시민과 함께하는 통일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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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제

제5회 전국 통일콘텐츠 공모전 (제5회 통일인문학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영화비평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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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의 현재를 통해 배우는 통일로 향하는 길

-『Dear 평양』(2005作)


숙명여자대학교
김혜숙

0. 들어가기 전에

‘통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남과 북’이다.
당연히 통일의 당사자는 남과 북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남과 북, 한반도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일까.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중에 우리만큼 굴곡진 역사를 가진 이들이 또 있으랴.
이 작은 땅덩어리 허리춤에 그어진 선을 두고 남과 북의 사람들은 서로 남인 듯 살아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남의 손에 떠밀려 내 고향을 두고 타지의 척박한 땅을 일구고 갖은 멸시를 이겨내며 그 곳에서 민족의 뿌리를 내려 사는 이들도 있다. 바로 한반도 밖에 살고 있는 또 다른 "Korean"들. 그들에게 통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과연 통일은 한반도 안에 있는 남과 북의 사람들만의 문제인가?’라는 고민을 하던 와중, 분단 그리고 통일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Dear 평양>을 만나게 되었다. 

영화 속 부녀의 사이는 곧 남과 북의 사이, 한반도의 모습과도 꼭 닮았다.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살았던 세월. 그리고 다시 화해를 하기까지.
영화가 만들어진 지 8년이 지났지만 우리에게 주는 그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통일로 가는 길의 지혜를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 영화 소개

1-1 줄거리
명절에 찾아온 딸과 저녁을 같이 하며 아버지는 기분 좋게 맥주를 마신다. 용돈도 받으니 더 기분이 좋다. 딸이 혼기가 차서인지 결혼 할 남자를 물으니 ‘조선 사람이 좋다. 미국인도 일본인도 싫다.’ 이야기한다.
평범한 가정이지만 가만히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들은 일본어를 쓰기도 하고 한국어를 쓰기도 한다. 흔히들 말하는 “자이니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조총련 오사카지부의 부위원장을 지낸 간부다. 그리고 투철한 김일성주의자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젊은 날엔 맑시즘에 심취하였고 일본으로 와서는 조총련의 고위간부가 되었다. 그리고 수년 전 어린 삼형제를 혁명의 수도인 평양으로 보냈다. 
영희는 일본의 조선인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레 북을 고향으로 배우고 김일성주의를 배웠다. 고위 간부의 딸인 만큼 모범생으로 자랐지만 자유로운 일본의 분위기도 함께 겪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같은 김일성주의자가 아니다.
영화는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이제는 좀 편해지고 속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이기에 카메라의 흐름은 더없이 소박하고 친근하다. 애초에 기록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홈비디오 같은 느낌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어찌되었든 친근한 눈높이와 카메라의 흐름 등은 무거운 그 속의 내용이 무겁지 않게, 보는 이로 하여금 ‘옆집’ 이야기를 보는 듯 한 느낌을 들게 한다. 온전히 영화를 공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아버지가 병상에 자리하신 후, 지정석이었던 집 앞 조그마한 공간이 비춰졌을 때 그 공허함과 상실감, 허전함이 확 밀려와 닿았다.



1-2. 아버지의 ‘평양’ 그리고 영희의 ‘평양’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공간은 오사카에 있는 감독의 집, 그리고 평양이다.
평양이라는 곳은 관객에게도 생소한 곳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 대해 느끼는 바도 관객과 영화 속 인물들마다 각기 다르다. 

한반도 북쪽의 평양. 물리적으로 같으나 아버지와 영희, 각자에게 평양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아버지에게 평양은 “주석님이 계신 곳, 혁명 수도”이지만 영희에게 평양은 “위화감이 드는 곳”이다. 아버지에게는 반드시 한반도를 밟으리라, 돌아갈 것이라는 의지,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고 영희에게는 사랑하는 오빠와 조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평양은 “꼭 다시 밟아 보고 싶은 땅”이라는 공통된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에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상이, 사는 곳이 다를지라도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그 선 남쪽과 북쪽은 서로에게 꼭 다시 밟아 보고 싶은 땅이다.

결국 ‘평양’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상실에 대한 그리움이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잃어버린 조국, 가족, 물리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평양으로 대표된다.

1-3. 영희의 국적 변경을 허락하는 아버지. 
신기한 장면이 나온다. 국적을 남한으로 바꾸고 싶다는 영희의 말에 아버지는 그러라고 허락한다. 그와 동시에 뱉은 한 마디, “세상이 달라졌으니까.”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를 보면 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된다.
2000년 최초로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장면이 전파를 타고 한반도, 전 세계에 퍼졌다. 이후에 이산가족상봉, 개성공단추진까지 그간의 단절이 생소할 정도로 남북이 가까워졌다. 바야흐로 평화의 시대가 온 것이다. 한창 무르익은 2005년, 이 영화는 만들어졌고 한반도 내에서 흘러넘치는 평화의 분위기는 바다건너 오사카까지 퍼진 것이다.
나의 국적과 딸의 국적이 다르면 서로 완전히 돌아서야만 했던 대결의 시대가 마침내 그 마침표를 찍고 함께 살 수 있는 평화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체감했기에 아버지는 그간 금기시 되었던 것을 허락하고 편히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장면은 한반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책임감을 부여한다.
단순히 통일이라는 것은 한반도 내부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계에 퍼져있는 Korean Diaspora들의 운명이 판가름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냥 불편하니까, 귀찮으니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결국 우리를 좀먹게 할 것이다. 분단을 한반도 내의 문제로 한정짓고 단순히 한반도 내 구성원들만의 문제라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원치 않은 분단으로 발생된 수많은 “Korea Diaspora"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통일이라는 문제에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구성원들이다. 우리가 가진 특권이자,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평화의 정세를 만드는 것이다.
한반도 안에서의 정세는 나비효과가 되어 그 밖으로 뻗어 나간다는 것을 인지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며 통일을 대해야 할 것이다.

1-4. 아버지와 영희의 화해
병상에 누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으며 영희는 이야기한다.
사상이 조금 다르지만 아버지를 참 많이 사랑한다고. 다시 평양으로 함께 가자고.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둘의 화해는 이 어려운 ‘인정’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나의 생각을 강요하기도 하고, 다르다는 이유로 등 돌리고 살아온 진안한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이라 인정하고 화해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세월이 흘러서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성사된 것이 아니다. 부녀는 긴 시간의 단절을 끊어내고 함께 이야기하고 시간을 공유한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지만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했던 것이 과거 이 가족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제는 곁을 내어주고 대화를 하고 서로의 성장과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 우리가 해야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아버지의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과 영희와 맞잡은 두터운 손을 통해 말해주는 장면 아닌가 한다.

2. <Dear 평양>에서 얻은 통일의 지혜

최근 대통령은 독일의 드레스덴을 방문하여 이른바 ‘드레스덴 선언’이라는 것을 했다. 독일 통일을 상징하는 드레스덴에서 우리 민족의 통일 방향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나름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 내용 역시 앞선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을 많이 닮았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본 북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 당연히 함께해야 할 동반자인 북의 반응이 이렇게까지 차가운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생각해봐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우리는 분단 이 후 유래 없는 평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평화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과거로 회귀하는데 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력으로 일궈낸 평화는 순식간에 도둑맞았다. 
함께 했던 약속을 어기고 서로를 향해 비난을 일삼고 상대를 정치의 도구로 사용한 지난 5년, 그리고 최근까지의 일련의 행적이 결국 한반도를 다시 전쟁의 위험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그렇다면 급속도로 악화된 정세를 회복하기 위해서 당장에 필요했던 행동은 앞서 잘못했던 부분들을 시정하고 부족했던 남북 간의 대화를 재개하여 소통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드레스덴은 독일 역사에서 보면 동서독의 화합을 대표하는 곳이기는 하나, 독일의 통일은 흡수통일을 기반으로 하여 결국 통일 직후 많은 사회, 경제적 혼란을 야기 시켰다. 우리가 본받을만한 통일의 모델로 삼기엔 이미 그 시행착오가 분명히 드러났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 역시, 과거 훌륭한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남북 간의 대화가 단절된 지금, 그리고 그간의 정치적 합의를 모두 무시한 작금의 상황에서 인도적 차원의 ‘선심’만을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효력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상황과 맞아 떨어졌을 때 그 의미가 빛을 발하는 것이고,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현재 상황과 부응하지 않는다면 허울만 좋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결국 드레스덴 선언은 현 정부가 얼마나 통일에 대해 이해가 낮으며 구체적인 구상을 하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지금의 우리에게 처음으로 돌아가, 기본부터 지키라는 아주 단순한 명제를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다. 
감독이 한 한 인터뷰를 보면 부모님이 사는 아래층과 감독이 지내는 위층 사이의 계단을 ‘베를린 장벽’이라 부를 정도로 아버지와 영희의 관계는 심히 뒤틀려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부녀가 결국에는 뜨겁게 손을 맞잡고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영희가 성장하며 세운 그녀의 가치관을 인정하였고 영희 역시 아버지가 김일성주의자로 지냈던 세월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와 인정은 무조건적으로 상대가 맞다, 옳다고 가치판단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어색해 카메라를 빌미로 파인더 속의 아버지와 대화를 하다, 점점 카메라 밖에 있는 실물에 가까워지고 마음이 열리는 감독의 모습을 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렵지만 상대를 마주하려는 용기와 그 의지가 아닌가 싶어졌다.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 그간 쌓았던 모든 기반이 무너진 상황을 원망하고 넋 놓고만 있다면 분단은 더욱 견고해 질 것이다. 
담담하게 지금의 현실을 인정하고 타개할 수 있는 방책을 빠르게 모색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간 끊었던 대화와 소통의 길을 다시 두텁게 세우고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한반도 안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명이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노력한다면 통일로 향하는 그 길이 열리지 않을까.
더불어 다른 국가들의 통일 모델을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우리만의 통일 모델을 새롭게 세워야 할 것이다. 민간에서부터 시작한 교류를 통해 접촉점과 접촉면을 넓혔던 과거의 경험이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단절된 상황에서는 서로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비방만이 난무하게 된다. 서로를 마주하고 접촉하는 것, 엄혹한 시기를 떨쳐내기 위한 큰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 지금 필요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단되었던 개성공단의 재가동, 조속한 남북정상회담 및 실무진 회담 등이 필요하며 이 속에서 6.15, 10.4 공동 선언에 대한 합의를 다시 확인하여 남과 북이 입장을 명확하게 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3. 끝마치며

참 긴 시간,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 긴 시간을 이겨내고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평화를 만들었던 황금같이 귀한 경험도 있다. 영화가 만들어졌던 시기는 우리에게 평화가 공기와 같이 느껴지던 시기였다.
지금 2014년, 또 다시 일촉즉발의 위기가 한반도를 가득 채우고 있다. 평화의 땅이 아니라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는 땅이 되었다. 또 다시 과거 냉전과 같이 혹은 그보다 더 심하게 서로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지금, 결국 평화와 대결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어떤 정세를 유지하는가는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분단의 불편함이 익숙함으로 변해 이제는 아무렇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익숙함이, 고요함이 평화는 아니다. 그리고 이 불안정한 상황은 타지에서 조국을 바라보는 수많은 Korean Diaspora의 삶도 불안하게 만든다. 내 고향, 내 조국을 편히 밟아보지도 못하는 고요함을,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두고 불안한 안정을 평화라 착각하고 분단을 쉬이 여기는 것은 종국에는 더 큰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평화를 만들었던 원동력, 그리고 이것을 한순간에 뒤엎은 이 모든 것은 대화와 소통이다. 
결국 기본을 지키는 것이 답이다. 가장 기본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어려운 ‘대화’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