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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회 국내학술심포지엄] 2025.04.26 분단적 이념화와 탈이념적 다원화, 코리언의 지성사적 가치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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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26() 55회 통일인문학 국내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분단적 이념화와 탈이념적 다원화, 코리언의 지성사적 가치지향을 주제로 한 이 학술심포지엄에는 세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먼저 박민철 HK교수는 탈식민, 탈냉전, 탈분단의 동아시아론: 1970~1980년대 동아시아적 감각의 출현과 그 갈래들에서 1970~1980년대 한국의 동아시아 담론을 추적하고자 했다. 1990년대 동아시아는 단순한 지리적 범주로 고정되지 않았던 유동적인 개념으로서 여러 문제의식과 접속하며 실질 효력의 담론체계를 형성해 나갔다. 이른바 동아시아론이 그렇게 등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계보학적 정리에 따를 때 ‘1980년대는 아직 동아시아 시각이 본격적으로 정립되기 이전의 시기로 전제된다. 그런데 동아시아론이 1990년대의 시대 조건 속에서 이념과 실천의 구체성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그 기원은 1970~80년대에 형성된 동아시아적 의식속에서 선취되고 있었다. 이 연구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1970~80년대 동아시아적 의식에 탈식민, 탈냉전, 탈분단의 감각과 인식이 놓여 있었음을 확인한다. 다시 말해 이 글은 1990년대 확립된 동아시아론의 인식론존재론적 토대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되묻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목적 아래, 1970~80년대 한국의 담론장에서 등장한 동아시아 관련 이론적 검토를 분석함으로써 거기에 담긴 동아시아적 감각과 인식을 추적했다. 이에 따라 제2장에서는 근대화론의 분화 속에서 탈식민의 과제와 연동된 동아시아적 감각과 인식의 출현이 어떻게 동반되고 있는지를 살펴봤다. 3장에서는 탈냉전의 기획과 함께 동아시아적 감각과 인식이 어떻게 확장되고 있으며 동아시아론의 이론적 토대로 내재화되는지를 확인했다. 4장에서 동아시아적 감각과 인식이 탈분단과 연동된 동아시아성에 대한 자각적 고민과 함께 그 구체성을 어떻게 확보하는지를 밝혔다. 마지막으로 제5장에서는 동아시아론의 의의와 미래적 전망을 논의했다.

 

다음으로 박영균 HK교수는 1980년대의 지성사, ‘삼민의 이념적 이념화와 트라우마적 주체들: 관념적 급진성과 어긋난 시간성, 그리고 사후복수를 통해 1980년대의 지성사를 탈식민-탈분단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했다. 이 글은 1980년대의 운동이 삼민으로부터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980년대의 고유성이기도 한 이념적 급진화로 나아갔는지를 식민-분단의 역사적 트라우마 및 당시 한국 사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억압된 리비도의 폭발과 관련하여 다루고 있다. 여기서 1980년대 이념적 급진화의 주체는 ‘5.18’ 트라우마에 감염된 자들일 뿐만 아니라 그날의 진실을 은폐하는 국가 폭력에 맞서 싸우면서 애도하기를 실천하는 애도 수행적 주체이자 ‘5.18’ 광주의 시민들이 하고자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것을 반복해서 감행하는 후사건적 주체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과정은 1970년대 중반 정립된 삼민이 갑오농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역사-구조적으로 응축되었던 모순이 폭발한 것이자 민주화를 정점으로 한 탈식민-탈분단의 이념적으로 급진화한 것이다. 따라서 이념적 급진화는 민족, 민주, 민중의 분열과 충돌로 나타나며 이는 1980년대 중반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의 핵심적 쟁점이 된다. 여기서 민족과 민중의 분열은 NL/PD로의 계열화를 낳으며 87년 체제를 넘는 급진성의 영역을 열어놓았다. 이 당시 논쟁은 서구와 다른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밝히려고 했다는 점에서 세간의 평가와 달리 매우 탈식민화된 논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의 이념적 급진화는 세계사와 한국사 간의, 1987년의 민주화와 이념적 급진화 사이에 어긋난 시간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념적 급진화는 관념적 이념화를 벗어나지 못했고, 냉전의 해체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전개와 더불어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1980년대는 일괴암적이고, 편협한 독단적 이념의 시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후, 전개될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씨앗을 품고 있는 사회문화적 변혁의 시대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것은 향후 도래할 소비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현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은주 HK연구교수는 전은주, 조선족은 누구인가’: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 지성 담론의 분화와 정치성에서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 사회에서 전개된 정체성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분화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정치성과 실천 전략이 나타났는지를 탐색했다.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로서의 민족적 동일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조건과 정치적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되기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은 중국 내 소수민족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한국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자기 인식과 정체성 실천을 요구받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지식인 담론은 서로 다른 시대 감각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정체성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으로 분화되었다.

이를 고찰하면 첫째, 정판룡과 김강일은 조선족 정체성을 둘러싸고 각각 귀속의 윤리변연의 전략을 제시했다. 정판룡은 중국 내에서 민족성을 보존하는 현실적 생존 전략을 강조한 반면, 김강일은 경계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자율적이고 전략적인 문화 실천을 주장했다. 둘째, 조성일과 황유복의 논쟁은 조선족 정체성의 이중성을 둘러싼 정치적 충돌을 보여준다. 조성일은 조선족이 중국의 공민이자 동시에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이중성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황유복은 이러한 이중성 개념을 부정하며 조선족을 중국 내에서 완결된 민족 주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셋째, 김문학과 김관웅은 정체성의 탈구성과 윤리적 책임을 두고 논쟁했다. 김문학은 민족적 동일성을 해체하고 초국적이고 개인적인 정체성을 제안했지만, 그의 논리는 극단적인 친일 성향으로 이어지면서 윤리적 비판을 받았다. 반면 김관웅은 민족의 역사적 상처와 기억을 기반으로 하는 윤리적 정체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김문학을 비판했다.

결론적으로, 이 연구는 조선족 정체성이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경계 위에서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변화하는 조선족 되기의 정치적 실천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수렴될 수 없으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논쟁과 실천의 장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