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유효한 ‘가족애’와 ‘인간애’, 원초적인 통일로의 접근
-영화 <붉은가족>비평문-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진경
1. 들어가며
2010년의 5·24 조치로 인해 남북교류와 한반도의 통일 가능성이 멈춘 가운데, 최근 박근혜 정부는 이른바 ‘통일대박론’을 제시하면서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한반도의 냉랭한 분위기가 일시적으로 해소되리라는 기대가 커졌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이전의 남북이 행했던 여러 협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고, 북한 또한 ‘드레스덴 선언’을 전형적인 흡수 통일 논리라고 평하며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이와 같은 사회 현실은 이전에 남북이 걸어왔던 행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남한과 북한은 각자를 기준으로 삼았다. 자신을 중심으로 타인을 바라보면 대상을 이해할 수 없듯이, 남과 북은 서로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끊임없이 남한과 북한의 상부구조가 생산해낸 이데올로기를 강요했다. 그 과정속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은 눈물을 삼켜야 했고 남과 북이 만들어내는 마찰음에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는 줄어들었다.
새로운 해법이 제시되어도 그것이 과거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한반도의 미래는 어떻게 결정지어질 것이며 어떠한 방향으로 갈등은 해소되어야만 할까. 영화 <붉은 가족>은 ‘일단 만나라’고 이야기한다. <붉은 가족>은 간첩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이 개봉되는 시류 속에 있지만, 여타의 영화가 북한과 북한 공작원을 단순한 흥미성이 짙은 영화의 소재로 사용한 것과는 달리,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이야기하며 남북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과감한 해법을 제시한다.
2. ‘창수네’와 ‘진달래’로 상징화된 남한과 북한
영화 <붉은가족>은 흔히 북한, 분단, 통일에 대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스파이’를 소재로 택했다. ‘진달래’는 북한의 남파 공작원 집단으로, 평소에는 평범한 가족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 겉으로 보기에 예의를 중시하고 고상해 보이는 이 가족이 하는 일은 지령을 받고, 남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탈북자를 사살하는 일이다. 이들의 진짜 임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예의바르고 서로를 존중하는, 존경받을만한 가족상이기 때문이다.
옆집에 살고 있는 ‘창수네’는 ‘진달래’와는 상이하다. 질서정연한 ‘진달래’에 비하면 가족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매일 고성이 오가고, 자식이 결점있는 부모를 무릎꿇리고, 말끝마다 ‘돈’을 외치는 ‘창수네’는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이는 가족이다. ‘백승혜’는 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고는 한다. 북한에서는 상당한 양의 쌀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인 만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창수네’는 상식 이하의 행동을 보인다.
(이미지 출처 : 영화 <붉은가족>, 모든 첨부이미지의 출처 동일함)
이처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가족의 생활방식은 상이하다. 두 가족은 너무나 다를뿐더러, 어울리기 힘들어 보인다. 이를 통해 남과 북이 각각 ‘창수네’와 ‘진달래’로 상징화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두 가족이 남한과 북한으로 상징된 부분이, 상호간의 인식을 대변한다는 점이다. 북한이 말하는 남한은 ‘썩은 자본주의의 사상’에 젖어있는 사회이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곳이다. ‘창수네’는 이에 정확히 부합한다.
한편 남한이 인식하는 북한은 어떠한가? 북한은 이념을 과도하게 최우선으로 두어 국민들이 소외되어 있는 왜곡된 사회이다. 사회 구성원들을 서로를 이념 수호라는 목적으로 끊임없이 감시하고 비판한다. 남한이 바라보는 북한의 모습을, ‘진달래’는 모두 갖추고 있다. 이처럼 ‘창수네’와 ‘진달래’가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관객들은 과연 남한과 북한이 공존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영화에서 사회 현안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3.<붉은 가족>의 세대별 상징성
<붉은가족>의 가족 구성원은 ‘진달래’와 ‘창수네’ 모두 3대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을 겪고 분단을 몸소 경험한 ‘조명식’과 ‘창수 할머니’, 현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는 중, 장년층을 상징하는 ‘백승혜’와 ‘김재홍’ 그리고 ‘창수’의 부모, 자유로운 신세대인 ‘오민지’와 ‘창수’가 그것이다. 이러한 ‘가족사적’인 영화의 구성은 각 세대를 대표하는 이들의 상징성과, 이에서 촉발되는 유의미를 파악하게 한다.
우선 1대에 해당하는 ‘진달래’의 ‘조명식’과 ‘창수네’의 ‘창수 할머니’는 전쟁과 분단, 그리고 전후복구를 일궈낸 세대를 상징한다. 이들은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를 위한 전쟁으로부터 발생한 이산가족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겪어낸 세대이다. 격동의 시기를 살아갔던 주체인 이들은 속으로 잔뜩 곪아있는데, 이는 ‘조명식’의 몸에 자리한 암세포로 상징화 되어있다. 비단 ‘조명식’뿐만 아니라 전쟁과 전후 복구를 경험한 세대들은 그들의 아픔을 인정받지 못했다. 국가가 제시하는 이데올로기에서 탈선해 개인의 아픔을 논하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상처를 말하는 것에 익숙치 않다. 말할수 없었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없이 서툰 이들은 극에서 ‘조명식’이 그의 병을 알리지 못하고, 나머지 ‘진달래’의 구성원이 어렴풋이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만 생각하는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
다음으로 직접 전쟁과 분단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문제를 감지하였으나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2대는 ‘진달래’의 ‘백승혜’, ‘김재홍’, 그리고 ‘창수의 부모’이다. 이들은 분단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적은 없다. 이들은 국가와 같은 상부구조가 생산해낸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종속된 상태는 아니나, 상대의 주장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두 가족이 함께한 자리에서, 북한의 소식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하는 토론을 통해 구현된다.
2대에 속하는 이들은 서로의 입장을 좁히지 못한다. ‘창수의 부모’는 북한을 이해할 수 없고, ‘진달래’의 ‘백승혜’와 ‘김재홍’도 마찬가지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기에 급급하다. 상대에 대해 이해하려 시도하는 행위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는 전쟁 후,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져 온 남과 북의 접촉을 사뭇 닮았다. 남과 북도 영화에서의 2세대들과 마찬가지였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회담을 진행하면서도 수십 개의 조항을 각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 하여 합의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시간은 지체되었고 국민들은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전쟁의 연장선상을 떠올렸고, 집단적 트라우마는 더욱 그 골이 깊어졌다.
마지막으로 ‘창수’와 ‘민지’는 극에서 등장하는 구성원 중 가장 어린 세대로서, 허울 뿐인 이데올로기의 맹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문제점을 풀어가고 통일과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내포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그들의 생각을 말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앞선 1,2대가 각각 아픔을 말하지 못하며 이데올로기를 투영하는 생각을 내뱉기에 그친다면, 이들은 새로운 담론을 제시한다.
3대가 제시할 수 있는 방향성은 지극히 긍정적이다. ‘오민지’는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어른들에게 ‘들어보세요!’라고 크게 외칠 수 있는 존재이다. ‘오민지’와 ‘창수’는 주장하기에 앞서 듣는 행위가 우선시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야 차이가보이고, 그에서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푸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이 과정이 동반되지 않고는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단순한 어린아이들의 치기가 아니다. 남북관계는 경험적으로 같은 과오를 되풀이해왔으니, 이제는 방향 전환을 해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는 접근법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가족애’와 ‘인간애’로 풀어내는 갈등
‘진달래'는 북한에 있는 가족을 위해 가족 행세를 한다. 늘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들이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요원들이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족 또한 한 울타리 너머의 '창수네'이다. 이처럼 '가족을 위해' '가족을 연기'하는 '진달래'는 모순적이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한탄하듯 읊조리듯이, 가족이라 하면서 함께 살아가고 일상을 공유하지만 진짜 가족이 될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달래'에게 지령을 내리는 북한의 다른 공작원들도 모순적이다. '진달래'가 자본주의에 물들었음을 주장하는 이들도 본연의 임무를 잊었음은 마찬가지이다. 북한의 가족들을 생각하라며 '진달래'를 압박하는 지휘관도 남한의 여인과 사실혼 관계에 있다. 가족단위를 이룬 것이다. 또한 '진달래'를 감시하고 사살하려 하는 또 다른 공작원들도 남한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여유를 즐긴다. 목숨을 잃기 직전 ‘백승혜’는 ‘당신들도 우리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지’를 묻고, 이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이들의 모순적인 속성은 사상이 표면적으로 남한에 비해 강조되는 북한과 그에 속한 공작원들에게서 두드러질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영화가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에서 그치지 않고 서사는 시종일관 원색적인 감정을 앞으로 내세운다. 이는 등장인물의 행위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가족애’와 ‘인간애’가 그것이다.
‘백승혜’는 공작 조원들이 옆집인 ‘창수네’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는 것을 제지하지 못한다. 알아서 조심할 것을 당부하지만 오히려 독려하기도 한다. 이는 그녀 자신이 정신적 유대를 나눌 상대를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음은 물론, 함께 맞닿아 살며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진짜 가족’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창수네’와 ‘진달래’는 서로 섞이지 못했지만 그것은 순간이었을 뿐 그들은 마음을 열고 서로를 대한다. 무작정 저녁을 함께 먹자며 일상에서 접해오는 ‘창수네’의 기세 앞에서 ‘진달래’의 실체 없는 이념적 투철함은 사라진다.
‘진달래’ 공작원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창수네’ 살해 공작도 이들이 공유한 인간적인 면모와 감정적 유대 앞에서는 무기력한 계획이다. 오히려 ‘진달래’는 본인들의 생명을 포기한다. 서로간에 쌓인 정신적인 공유의 기억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진달래’는 늘 부러워했던 ‘창수네’의 투닥거림을 연기한다. ‘창수네’에 늘 싸움이 있어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안정감 앞에서는 갈등도 관계 확인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울부짖으며 가족을 연기하는 이들은 더 이상 ‘가짜 가족’이 아니다.
이러한 ‘가족애’와 ‘인간애’의 파토스는 영화에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폭로하고 있으며 남북이 취해야할 자세도 함의하고 있다. 한반도의 통일과 통합을 가져올 주체는 상부구조가 아닌 바로 ‘가족애’를 갖춘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개체인 가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상이하고 이질적인 상대를 대하는 ‘인간애’는 그 어떤 대립이나 갈등도 무마시킬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5. 나가며
어쩌면 영화 <붉은 가족>에서 제시하는 담론으로서의 ‘가족애’와 ‘인간애’는 과거의 남북의 행보처럼 식상한 감정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야기하듯이 ‘같이 살아야’ 가족이 될 수 없다. 떠나간 후에 가족을 운운하면 뒤늦고 소용없는 일일 뿐이다. 이렇듯 원초적인 인간 본연의 감정은 사회적인 요소, 이를테면 이데올로기나 제도 혹은 상이한 생활양식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가족애’와 ‘인간애’의 재발견은 바로 영화가 다소 서툴게 남한과 북한을 상징화하고 있다는 한계점을 무마할 수 있는 지점이다. 또한 위장 간첩이라는 흥미 위주의 소재를 가치있게 극에 위치시키고, 남한과 북한의 이항대립을 풀어내는 추동력을 극의 서사에 불어넣는다. <붉은 가족>이 제시하는 ‘가족적’이고 ‘인간적’인 태도가 오랜 남북갈등을 해소하고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을 되찾아올지 모르는 일이다.